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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박물관의 소중한 소장품을 소개합니다.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

  • 국적 일본
  • 수량 1
  • 시대 조선(18세기 초)
  • 전시영역 -
  • 재질 종이
  • 크기(cm) 40.5*151.5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 서문의 내용

余於癸巳秋奉命于朝, 來寓對州賓館矣.

有日本人以畵像簇子示之, 筆法淋離生氣滿紙.

問是誰人之像歟,

曰曾於草梁 訓噵家逢着醫士朴主簿,

累日受業, 多有所進師弟之情,

寤寐未忘, 而更難於親煮

故畵其生像. 朝暮獻酌云,

余聞之嗟嘆曰 世間豈有如此至誠之人哉.

朴主簿卽姪 子偉甫也.

問其名, 仁位氏朝隣云.

余敬其感其誠書請簇面以記之

冬旬二, 朴同知道卿爲仁位氏情, 以識不忘

나는 계사년 가을에 조정의 명을 받들어 대마도 빈관에 와 머무르고 있었다.

어떤 일본인이 초상이 그려진 족자를 보여주었는데 필법이 힘차고, 화폭에 생기가 가득했다.

이것은 누구의 상인가? 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초량(부산)의 훈도의 집에서 의사 박주부를 만나

여러 날 동안 수업을 받아 사제의 정으로 나아가게 된 바가 많았는데,

그리워 잊을 수가 없었으나 다시 친해지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살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다고 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이같이 지성한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박주부는 곧 조카인 위보이다.

그의 이름을 물으니 인위 조린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에 삼가하고 정성에 감동하였는데, 족자에 글을 청해옴으로 이를 기록한다.

겨울 2, 동지사 박도경이 인위씨의 정을 기록함으로써 잊지 않게 한다.


족자 형식에 일본 종이를 사용한 이 그림에는 한 인물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위에는 장문의 글이 적혀 있다.

장방형의 화면이 글과 인물 묘사 공간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져 있는 형식은 조선의 그림에서 찾기 쉽지 않다. 이런 형식 은 일본 회화에서 확인이 된다.

이렇듯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화면 속의 글과 화풍에서도 확인이 된다.

화면 위쪽에 있는 글은 자가 도경道卿인 박재창(朴再昌, 1649~1720 년 이후)의 제사題辭이다. 이 제사와 끝에 찍힌 인장은 그림에 담긴 사연을 말해주며, 시기 등에 대한 단서를 품고 있다.

그는 1713년에 예조에서 대마도 를 지배하는 다이묘大名에게 보내는 사절단, 즉 문위행問慰行의 일본어 통역관 수장堂上譯官으로 참여하였다.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1713癸巳에 조정의 명으로 대마도에 건너간 박재창은 인위 조린(仁位 朝隣)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이 일본인이 초상화 한 폭을 보여주자 그는 그림에 담긴 사연을 물었다.

인위 조린은 자신이 부산의 초량에 왔을 때, 6품 주부主簿이며 성이 박씨고 자호가 위보(偉甫)인 조선인에게 학업을 익혀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나 헤어지게 된 뒤에는 그를 잊지 못하여 초상화를 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다고 하였다. 박주부의 숙부였던 박재창은 사연을 들은 후 세상에 어찌 이렇게 지성한 사람이 있을까 감탄하고 초상화에 글을 적었던 것이다.

아마도 인위 조린은 대마도에 온 박재창이 박주부의 숙부라는 소식을 듣고 초상화의 제사를 받고자 방문한 것 같다. 이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은 부산의 의원 박주 부가 된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에게 무엇을 배웠는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박주부가 의원이었으므로 의학 지식이었을 것이다. 박재창과 자호가 위보인 박주부, 그리고 인위 조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인위 조린은 대마도에 거주하는 인물이라는 점 외에는 확인이 어려우나 두 조선인은 대강 알 수 있다. 찬문 말미에는 본적 등을 담은 도장貫籍世家印무안후인務安後人이 날인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사자와 그림 속 주인공의 본관은 무안박씨務安朴氏가 된다.

이들은 전형적인 중인 가문의 일원으로, 박재창은 물론 그의 증조부부터 자식 항렬까지 왜어 역관이 다수 배출되었 으며 의관 등도 나왔다.

이들을 비롯한 무안박씨 일족은 주로 왜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를 만나 학업을 배운 초량은 바로 왜관이 있던 곳이다.

이 초상화의 제작지는 복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물은 흉배胸背가 달린 관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품대品帶를 차고 있어서 마치 조선이나 명의 관복 官服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의 공작 같은 문양이나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와 그 속의 문양은 법식에 너무나 어긋나 있어서 정확한 이해를 갖고 그린 것이 아니라 형식만을 기억하거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린 것 같다. 이는 앞서 설명한 재질 및 형식과 아울러 초상 화가 일본에서 그려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조선에서 그려졌거나 인위 조린이 조선 화가에게 부탁했다면 이렇게 제멋대로 흉배와 품대를 표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인위 조린이 <박주부 초상>을 그렸는가는 확인되지 않아 확증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 그림은 당시 일본 내의 화단의 주요 유파이며 어용화사로 활동한 카노파狩野派 화풍과 관련이 있다.

오른쪽 으로 꽤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는 보통 정면에서 약간 비스듬한 자세八分를 표현한 조선 초상화나 정면을 향한 중국의 경우와도 다르다. 그리고 통통한 박주부의 모습은 실제 모습을 표현한 듯이 생기가 돈다. 인물의 외곽선은 일반적인 인물화의 묘법描法을 사용하여 굵기의 변화와 끊김이 자유 롭다. 이러한 모습과 기법은 마치 카노 츠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1711 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태억초상趙泰億肖像>을 연상시킨다.

박주부에 대한 인위 조린의 존경과 사모의 마음은 그림 속에 드러난다. 복식 은 정복正服에 해당하는 관복 형태이나 당초문 같은 문양이 들어가 있어서 마치 도교 선인이 입는 포를 연상시키며,

원형이고 금으로 그려져 있는 옷의 문양과 그 위치 중에는 양 어깨에 있는 것도 있어서 왕의 보같기도 하다. 또한 신발은 성현이나 신선의 인물 모습에 자주 등장하는 방리方履와 비슷하다.

이렇게 실재하는 동시대 인물의 모습을 그릴 때, 성현과 신선의 의관衣冠을 입히는 경우는 해당 인물을 존숭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조선에는 초상화법이 엄격한 탓에 18세기 후반부터 조금씩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꽤 일찍부터 보인다. 한편 인물이 쓴 모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에 보이듯이 의원이 평상복에 쓰는 것과 유사하여 주인공의 직책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수복壽福이 써져 있는 경우는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데, 의관이라는 직업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으나 박주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바람의 표현 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위 조린은 스승 박주부를 성현처럼 오랫동안 모시 고 싶었던 것 같다. 1713년 이전에 그려진 <박주부 초상>18세기 초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맺은 사제의 정을 표현한 한일교류의 상징물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의술로 맺어진 인연을 나타낸 최초의 작품이기에 의의가 더욱 높으며, 조선의 의사를 표현한 가장 앞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