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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독도 강치 씨를 말린 일본의 학살극…다케시마의 증거? 반문명적 범죄다
조회수 207 보도일 2019. 11. 30 원문보기(UR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300600005&code=960100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

독도 강치 씨를 말린 일본의 학살극…다케시마의 증거? 반문명적 범죄다

섬과 생태, 반문명의 그늘 : 독도 강치의 경우


사람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고 파도가 부서지는 섬을 무척이나 강인한 곳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섬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다. 산호섬을 예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된다.

태평양의 수심 수천m에 솟구친 화산섬 주변에 산호가 형성되려면 무한시간대가 요구된다. 자연과 지질의 시간은 척도가 인간의 시간과 전혀 다르다.

그토록 오래된 자연과 지질의 시간조차도 파괴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인류의 해양문명사는 어쩌면 섬과 섬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을 가로지른 대항해시대의 역사가 그러했다.

아메리카로 건너가기 이전에 카나리아제도가 ‘발견’되어 원주민이 학살되고 새로운 종이 이식되었다.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의 다양한 섬에서도 인간과 언어, 생물과 지질의 역사가 뒤섞이고 멸종되거나 변종과 잡종으로 다시 태어났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경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 어머니 대지>를 출간했다. 2015년 교황이 발표한 생태 회칙 ‘찬미 받으소서’의 연장선이다.

교황은 모든 이의 생태적 회심을 촉구하며 지구, 바다, 공기, 동물에게 가해진 해악도 포함시켰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개심에 가까운 행동에서 연약한 섬은 언제나 원초적 침략의 대상이었다.

■도도와 강치, 그리고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오사카 천왕사 박물관에 박제로 남은 독도강치.

오사카 천왕사 박물관에 박제로 남은 독도강치.

비바람 거세게 몰아치던 1667년 어느 날 새벽, 마지막 ‘도도’가 죽음을 맞이했다.

사라진 새 ‘도도’의 마지막 순간, 그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도도’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 침입자가 없는 낙원인 모리셔스섬에 살던 도도는 유럽인이 등장하면서 모조리 쓸려갔다. 진화는 수십만년에 걸쳐 일어났지만 종 멸종은 100여년이면 충분했다.

베링탐험대가 베링해에 당도했을 때, 거대한 바다코끼리들이 우위종을 차지하며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탐험이 계속되면서 불과 10여년 만에 많은 바다코끼리들이 사라졌다. 듀공이라고 부르는 바다소는 초식동물이다. 듀공은 들판의 풀을 뜯듯이 바다를 누비고 다녔으나 종 멸종의 리스트에 오른 지 오래다.

섬에서 사라진 것은 동물만이 아니다. 태즈메이니아섬에서 1만년 넘게 살아온 원주민도 1876년에 완벽히 사라졌다.

원주민의 최후는 지구상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멸종 동물의 최후와 다를 게 없다. 사진으로 남은 원주민의 초상화는 종 멸종이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자행될 수 있음을 입증할 뿐이다.

한반도의 독도라는 지극히 작은 섬에서 멸종된 강치도 같은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인 사냥꾼이 환동해의 고립된 ‘낙원’으로 몰려왔을 때, 천진난만하고 태평스럽게 살아온 강치도 난폭한 사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강치 종 멸종은 세계사적 규모로 동시 진행되던 반문명사적 집단학살의 결과다. 생태사관 입장에서 바라본 독도강치의 멸종, 그리고 일본이 종 멸종을 야기했음에도 적반하장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해양사의 궤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 반문명사적, 반생태사적 행위의 책임

그 많던 독도강치는 어디로 갔을까. 수만 마리가 살아가던 환동해 최대의 강치 서식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집단학살극이 벌어졌다. 환동해 복판에 솟은 화산섬이라는 생태환경적 특수 조건에서 집단서식해온 강치는 누대의 역사를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러나 에도시대 이래로 강치는 그물에 갇히고 총칼에 죽임을 당했다. 가죽이 벗겨지고 기름이 되어 본토로 실려 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무차별 강치 사냥으로 결국 독도강치는 멸종을 고했다.

얼마만큼의 강치가 집단학살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기존 역사관을 뛰어넘어 세계관의 전환과 모색이라는 문명사의 맥락에서 볼 때 독도의 강치 종 소멸은 생태사적 범죄다. 일본은 ‘다케시마 영토론’의 주요 근거로 독도강치잡이를 들이댄다.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강치잡이를 통한 독도 경영은 사실상 반문명적인 범죄행위였다.

독도 문제에서 오로지 영토 문제로만 비분강개할 것이 아니라, 그 섬에서 사라져간 강치의 비극적 떼죽음을 조명하고 반문명사적, 반생태사적 일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질문이 본격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독도 문제의 거시사

1712년 출판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에 기록된 물범과 강치.

1712년 출판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에 기록된 물범과 강치.

강치를 둘러싼 첫 번째 국제적 사건은 이른바 ‘죽도일건’이다. 남의 나라 섬에 왜나라 사람들이 몰려왔다. 1618년 막부는 도해 면허를 발급했고, 일본 돗토리현의 소도시인 요나고 사람들이 죽도(당시 울릉도)와 송도(독도)로 출어했다. 필연적으로 조선 사람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역사에서 ‘죽도일건’이라 명명하는 사건이 그것이다. 안용복이 뛰어들어 일본까지 쫓아가서 국제적으로 대응했으며, 사건의 전모가 조선 조정에도 보고되어 커다란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어업권과 영유권을 차지하려는 조선과 일본 간 외교 교섭이 죽도일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조·일 간의 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막부는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 1696년 1월에 두 가문의 도항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죽도일건은 끝이 났다.

강치를 둘러싼 두 번째 국제적 사건은 독도 강제 편입과 산업적 강치잡이다. 통감부가 시작된 1905년, 강치잡이 허가를 빌미로 ‘다케시마가 시마네현에 편입’됐다. 1905년 6월에는 ‘다케시마 어렵합자회사’가 설립되어 조직적 어업이 시작되었다. 어렵회사는 1904년부터 1941년까지 강치 1만6500마리를 잡았다. 남획으로 강치가 급속도로 줄어들어 1930년대에 희귀종이 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는 가죽용보다는 동물원과 서커스 구경거리로 포획되었다. 상업적 강치 사냥은 1940년대에 종료되었으나 강치는 이미 사실상 멸종한 상태였다. 일본이 에도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강치를 남획한 결과, 독도강치는 결국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 독도 문제의 미시사: 고카이촌 구미 사람들의 ‘기억 투쟁’

일본, 특히 독도로 출어하던 시마네현의 오키제도 사람들의 장기지속적인 심성사(心性史), 즉 망탈리테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도 문제는 크게 보면 한·일 양국의 ‘거시사’지만, 오키제도 사람들에게는 강치잡이가 어촌과 가문의 ‘미시사’로서 여전히 잠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키 사람들은 1905년 나카이 요자부로의 어장 허가 취득 이전부터 독도 어장으로 나갔다. 오키는 많은 배를 가지고 있어서 대항해가 가능했다. 그 해양력으로 일찍이 독도에 출어했으므로 울릉도와 독도를 넘본 것이다. 최초의 울릉도 입도 일본인도 이들 시마네현 사람이다.

오키섬 최북단에 고카이촌(五箇村)이 있다. 일제는 1905년 독도를 병합해서 오키섬 관할에 두었으며, 1939년에는 오키섬 내에서도 고카이촌으로 편입시켰다. 고카이촌의 북단 마을인 구미(久見)는 독도 문제의 진앙지다. 고카이촌에서도 구미 사람들이 독도로 출어했기 때문이다. 구미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하여 연도별 강치잡이 총량과 종의 멸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구미 사람들은 1953년 7월과 그 이듬해에 독도를 비밀리에 침입한 경험을 사진과 기록을 통해 잘 기억하고 있다. 마을에 ‘다케시마 역사관’을 지었으며, 고카이촌 향토관에서는 다양한 독도 아카이브를 소장·전시 중이다. 시마네현 청사에 있는 다케시마 자료관도 독도 자료를 수집·전시 중이다. 이처럼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권’ 주장의 진앙지는 ‘구미-고카이촌-시마네현’으로 이어지는 수미일관된 체계를 지닌다. ‘에도-메이지-다이쇼-쇼와시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장기지속적인 그들 나름의 ‘기억 투쟁’에 입각한다. 독도강치를 멸종시킨 반문명사적, 반생태사적 범죄에 관해서는 단 한 줄의 반성도 남기지 않고 있다.

■ 섬과 생물의 약탈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권한

오키섬의 고카이촌은 맨홀 뚜껑에도 강치를 새겨두었다.

오키섬의 고카이촌은 맨홀 뚜껑에도 강치를 새겨두었다.

큰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걷던 도도를 완벽하게 멸종시킨 유럽인은 도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화하고 생태계 소멸의 소중한 사례로 간직하려 한다. 일본인 역시 독도에서의 강치잡이에 관한 기록을 비롯해, 강치 그림책을 펴내고 인형을 만드는 등 여러 방편으로 독도를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의 의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치잡이를 근거로 ‘다케시마 영유권론’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집단학살을 통한 강치 종 소멸에 대한 반성의 의사는 전혀 없다. 이것은 도도와 강치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강치 멸종의 문명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강치라는 한 종의 멸종에 관해 슬픈 조종을 울리고, 그로부터 환동해와 독도에서 ‘평화의 바다, 생명의 바다’라는 미래의 꿈을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 부문에서라도 공유해나가야 할 것이다. 뒤늦게나마 강치에 관한 공식적인 관심이 서서히 표명되기 시작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며칠 앞두고 해양수산부는 마침내 독도강치 기념비를 독도에 세웠다. 2019년, 한·일관계는 안갯속으로 접어들었다. 사라져간 강치 이야기가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도 언급되었으며 다시금 사회적 주목을 끄는 중이다. 강치를 기리는 에피타프(기림비)를 세워둘 필요가 있다. 해양 영토를 둘러싼 독도 문제에서 생태사관에 입각한 해양문명사적 성찰이 필요하다.

사라져간 강치를 오늘날로 다시금 소환하고, 해양문명사적·생태사적 성찰로 다시 기억해내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이처럼, 바다와 문명의 서사시에는 ‘흑역사’의 어두운 그늘도 곳곳에 잠복해 있다. 강치를 둘러싼 흑역사는 바로 오늘날 한·일 간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연약한 섬을 침입해 정벌하고 유린하던 항해의 역사가 남긴 흔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