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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그리스·이슬람 천문학이 없었다면 ‘대항해 시대’는 불가능 했다
조회수 474 보도일 2019. 11. 01 원문보기(UR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011636005&code=960100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

그리스·이슬람 천문학이 없었다면 ‘대항해 시대’는 불가능 했다

(11)그리스와 이슬람 문명에 빚진 ‘유럽문명’

이슬람세계가 남긴 방대한 유산은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군의 과학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역시 아랍 학문지식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판단한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코페르니쿠스 동상.

이슬람세계가 남긴 방대한 유산은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군의 과학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역시

아랍 학문지식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판단한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코페르니쿠스 동상.

■ 해양세계에도 강력히 잔존하는 오리엔탈리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소리를 감미롭게 들으며 많은 관광객이 안달루시아 지방을 찾는다.

알람브라 궁전은 두말할 것 없이 이슬람 건축양식이다. 언뜻 기독교 문명의 유산으로 보이는 건축군 다수가 이슬람 문명의 강렬한 역사적 유산에서 개조되었다.

아랍세계의 오랜 지배를 거쳤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남부, 아프리카 북부 등지에는 건축술, 언어, 종교 등 아랍 문명의 흔적이 완강하게 장기지속 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대항해를 받쳐준 항해 기술력도 이슬람 문명에 힘입었다.

미국의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오리엔트 사회, 특히 아랍세계를 바라보는 서구인의 태도를 비판했을 때, 이는 해양세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고대 로마가 중국과 교류했다면, 아랍의 신드바드 상인이나 페르시아 상인은 일찍이 동서 문명 교류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수중 발굴되어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침몰선 유물도 페르시아 무역선이다.

기독교 문명권 위주로 서술되어온 에스파냐 해양력에 관한 지금까지의 주류적 시각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에스파냐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피지배 시기를 가급적 축소 서술하고, 아랍인을 몰아낸 시점으로부터 자신들의 문명 발화를 강조하고픈 나름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8세기 초부터 13세기 말까지, 500여년에 걸친 아랍 지배 시기는 오랫동안 에스파냐 역사가에게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단순하게 피지배의 시대가 아니라 ‘재정복의 시기’로 적극적으로 해석해 정리되었다.

중세사를 레콩키스타라는 거대 드라마로 재구성함은 에스파냐 사람들 자아상 성립의 소중한 특징이 되어왔다.

점령당한 피지배기보다는 중세 조상의 민족적 신화화가 필요했다.

에스파냐 중세의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역사는 이런 과도한 단순화를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위장막을 걷어내면 이슬람 문명의 거대한 족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 그리스에서 아랍을 거쳐 스페인으로 건너온 아스트롤라베

아랍 글자가 새겨진 아스트롤라베.

아랍 글자가 새겨진 아스트롤라베.

유럽 안의 이슬람 문명을 표징하는 좋은 사례가 아스트롤라베(astrolabe)다. 아스트롤라베는 본디 그리스 천문과학기술의 성과물이다.

그리스 천문과학기술을 이슬람이 응용하여 새 방식으로 번안·수용했고, ‘이슬람-에스파냐’를 통하여 에스파냐 및 유럽으로 도입된다.

카타르 도하의 이슬람박물관에는 항해 도구의 압권인 아스트롤라베가 상당량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에서 아랍 글자가 새겨진 아스트롤라베와 라틴어로 쓰인 에스파냐의 아스트롤라베를 비교 전시해놓았다.

한눈에 봐도 에스파냐 것이 아랍 것을 그대로 갖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랍 문자가 각인된 아스트롤라베가 훗날 유럽 문자로 변해갔을 뿐이다.

이슬람 아스트롤라베는 어느 특정 수공예 가문에 의해 대대로 만들어졌다.

세습된 가문의 장인은 그 손노동이 날로 정교해졌고, 마침내 과학기술의 첨단 경지까지 올랐다.

아랍의 이베리아반도 지배 시절에 많은 아랍 과학자가 이베리아반도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도 아랍어를 구사하고 있었으며, 이는 700년이 넘는 오랜 점령 덕분이었다.

■ 바그다드 아바스왕조의 번역운동

그리스 천문과학기술을 이슬람이 응용해 새 방식으로 번안·수용한 아스트롤라베(해시계·위쪽 사진). 카타르 도하의 이슬람박물관에는 상당량의 아스트롤라베가 전시돼 있다.

그리스 천문과학기술을 이슬람이 응용해 새 방식으로 번안·수용한 아스트롤라베(해시계·위쪽 사진).

카타르 도하의 이슬람박물관에는 상당량의 아스트롤라베가 전시돼 있다.

그리스가 멸한 후, 그들이 남긴 문명의 잔흔들은 그 땅에서 다수 사라졌다.

그러나 역사는 그 누군가 기억하고 전승하는 이들에 의해 이어진다. 애초에 그리스 문명의 다양한 증거들을 현재의 역사로 소환한 이들은 유럽인이 아니었다.

훗날 유럽에 의해 그리스 문명이 소환되고, 마침내 ‘유럽 문명의 뿌리는 그리스 문명’이라는 방식이 성립하기 훨씬 전에 무슬림들이 그리스 문명을 소환했다.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 말까지 비잔틴 제국 동부와 근동 전역을 손에 넣은 아바스왕조는 첫 200년 동안 바그다드에서 전례 없이 그리스어의 아라비아어 번역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켰다.

수많은 그리스의 문헌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문명의 번영에 힘을 부여했다. 그리스 문헌 전체, 즉 헬레니즘, 로마, 고대 말기에서 당대까지 전승된 기록물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점성학과 연금술을 비롯한 비학(秘學),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이론 등 4과(科),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철학, 의학, 약리학, 수의학, 군사학 등을 망라한 국가적 번역사업이었다. 제국의 총력을 기울여 당시까지 세계사적으로 축적되어 있던 지식의 총량을 번역하고자 했다. 인류문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메가 프로젝트’가 바그다드에서 진행된 것이다.

아랍인이 점령한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 지역에서는 당연히 문화융합이 벌어졌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바그다드와 동일선상에서 지식정보가 통용되었고 새롭게 창조되었다.

아랍인이 퇴각한 후에도 그들이 남긴 선진 과학기술이 에스파냐 대항해의 건실한 기초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 에스파냐-이슬람 문명의 번영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8세기.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문명의 꽃이 피지 못했다.

에스파냐는 이슬람과 비잔틴의 발전된 문명에 비교할 때, 미개발 상태였다. 피정복자인 에스파냐 원주민 다수가 정복자 이슬람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개종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대략 850~1000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아랍어로 각인된 기독교도인 비석, 아랍어 기독교 성서가 전해 내려옴은 정복자 언어가 피정복자 문화에 깊숙이 침투한 정도를 말해준다.

종교와 언어뿐만 아니라 학문지식도 9~10세기에 이베리아 땅에 뿌리내렸다.

9세기에 이르러 아랍어가 원주민 사이에 널리 통용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개종하고, 혼인을 통해 혼혈도 이루어졌다.

개종자가 급증하자 아랍 엘리트 지배자와 에스파냐 원주민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그 결과 상당히 동질적인 에스파냐-아랍사회가 탄생했다.

에스파냐-아랍사회의 중심인 안달루시아는 여러 정복자를 거치면서도 정복될 때마다 새로운 왕국의 보석 역할을 했다.

에스파냐-아랍은 이베리아반도 지중해권역과 아프리카권역을 하나의 종교권역, 교역권역으로 단단하게 엮었다.

세비야는 그 권역의 중심으로서, 코르도바와 더불어 이들 안달루시아의 중심이자 당대 해양문명의 중심이었다.

에스파냐-아랍사회의 발전은 9~10세기의 엄청난 경제적 번영이 토대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오랫동안 점령함으로써 이슬람 역사 자체도 전환기를 맞이했다.

교역망은 알-안달루스를 이집트, 이라크, 이란, 심지어 인도에 이르기까지 멀리 떨어진 이슬람세계와 연결시켰다.

여러 분야에서 에스파냐-이슬람 문명이 풍요롭고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기본적으로 에스파냐는 아랍이슬람 문명의 변경 거점이었다.

덕분에 알-안달루스의 도시들은 지중해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 신대륙 발견조차 이슬람 유산과의 결합

아랍세계를 축출시킨 다음, 마침내 에스파냐는 곧바로 1492년 아메리카 발견이라는 중요한 사건의 극적 조명을 받으며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1492년 8월3일, 콜럼버스는 세비야에서 가까운 대서양 연안의 살테스 강어귀에서 모래톱을 가로질러 항해를 시작했다.

강한 바닷바람을 타고 카나리아제도 쪽으로 항로를 잡고서, 불과 2개월 만인 10월11일 마침내 신대륙에 당도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유럽의 힘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제노바의 콜럼버스를 비롯한 일군의 선진 항해전문가들, 아울러 유럽 대항해의 자금을 대준 유대인의 힘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에스파냐 해양력을 이베리아반도적 시각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슬람세계가 남긴 방대한 유산과의 결합을 온전하게 인정하는 인식 전환이 요구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선진적 항해기술이 이슬람에서 주어졌으며,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창조적으로 융합하지 않았다면 에스파냐 대항해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중심, 에스파냐 중심의 시각에 따라 이슬람 역할이 무시되고, 전적으로 에스파냐왕국의 독자적 힘으로 대항해의 모든 역사가 가능했다는 편향이 지속되어왔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면 코페르니쿠스 동상이 서 있다. 그의 지동설조차도 아바스왕조에서 번역한 그리스 과학체계에 기초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재적 독창적’인 생각이 분명히 존재했겠지만, 그의 글 목록에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학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군의 과학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 역시 아랍의 학문지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문명사에서 완벽한 단절은 없다. 몰락한 그리스의 문명은 흩어지고 소멸되어 갔지만 바그다드 아바스왕조를 만나서 ‘번역’되었다.

번역된 글은 다시금 유럽에 전달되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는 데 기반이 되었다. 그 그리스 문명조차도 ‘나 홀로 독자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 문명이라는 실체도 소아시아를 포함한 지중해권역의 다양한 수준의 문명을 포섭하고 진화시킨 결과다.

뚜렷한 증거물이 다수 사라진 페니키아 문명도 지중해를 통한 무역과 이동을 거치면서 문자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 수메르와 페르시아 문명의 유산도 소멸되지 않고 상호 연결되었고, 그리스 문명의 갈래도 인입되었다.

에스파냐의 초기 대항해술은 전적으로 이슬람의 힘에 의존했다. 먼 훗날, 후발주자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항해기술을 베껴 자신들 항해기술에 보탰다.

이렇듯 해양세계에서도 다양한 기술 진보와 혁신의 성과들이 교호하면서 문명의 바닷길을 열어나간 것이다.